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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짜든둥 굴러가는 나의 일상/나는 오늘

쿠팡에서 굴려지고 돈을 손에 쥐었다.

by 기대해박 2024. 1. 9.

평범한 회사원 박씨.
똑똑한 파이어족이 난무한다는 요즘 세상에
내세울 것이라곤 사지 멀쩡한 몸뚱이 하나가 전부인 덕에 남녀노소 조건을 가리지 않고 몸을 갈아 넣을 수 있다는 쿠팡 물류센터 알바에 도전해 보았다.
 
속칭 '쿠팡 알바'에 대해 그동안 떠도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막상 도전하기엔 너무 힘들 것 같고,
(솔직히 꼭 도전해야 할 이유도 없고)
주말이면 침대에 누워 유튜브 알고리즘을 부유하는 삶을 버리고 험한 세상 속에 들어가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막연하게만 의식하고 있다가
새해 뽕 맞은 김에 갑자기 질러보았다.
 
역시 고민은 짧게, 결정은 바로!
생각 않고 움직이면 인생이 풍부해진다!
 
24년의 첫 주말을 앞두고 전기 맞은 사람마냥 갑작스레 '쿠펀치' 어플 설치.(아마도 또 침대에서 누구 유튜브 보다 그랬나 보다)
첫 토요일, 일요일 2개 스케줄을 신청해 놓고 두근두근 기다리다가 토요일은 아쉽게도 마감 통보를 받고,
한번 떨어지고 나니 이상하게 오기가 생겨 다이소에 들려 쿠팡알바의 필수 준비물이라는 자물쇠와 초코 간식까지 미리 사놓고 일요일 스케줄 배정 기다리다 출근 확정(앗싸!)
 
인터넷 세상 사람들 얘기로는 보통 오후 3시 언저리에 출근 여부 확정 문자가 온다는데,
내가 신청한 센터는 첫날은 5시 반경, 두 번째 날은 4시 좀 넘어서 카톡으로 연락을 받았다.
 
도대체 내일의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근두근 잠을 설치다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셔틀버스를 타러 갔는데,
언제나 이용하던 지하철 출구 앞, 제대로 표시도 없는 정거장에서 매일 새벽 버스 한 대 분의 사람들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거기에 쿠팡 정거장이 있었던가? 하면서 나간 곳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데 일렬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자석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나도 줄에 합류.
버스는 시간이 되면 정말 칼 같이 출발한다.
 
그다음부터는 뭐 인터넷 찾아보면 후기 많으니까 -생략-
 
 
오랜만에 진짜 몸으로 일했다.
내가 간 공정은 진짜 힘든 일에 비하면 꿀이라는데도 팔목이 시큰거리고 발목도 고관절도 다 틀어진 것 같은 기분.
돌아오는 퇴근 셔틀에서는 종일 심신이 부대껴서인지, 버스 히터 때문인지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진짜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또 해보고 싶다.
(출근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벌써 다음 주말도 신청해 두었지!)

교육장에 앉아있는 나 자신을 보며 문득 엇,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싶기도 했고
커다란 건물 속에서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가, 그 와중에 소소한 성취감을 찾아보기도 하고.
이렇게나 종일 핸드폰 없이 지냈던 게 언제였지?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불안함과 평안함.
그러고 보니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걸 처음 봤구나. 속도가 저렇게나 빠르네.
저 사람은 진짜 여기랑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인데? 쟨 하기 싫은 것 같은데 왜 이 새벽에 여기 있을까?
나 지금 잘하고 있는건가?

비록 하루짜리 짧은 경험이었지만 내가 아는 것들, 내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은 진짜 이 큰 세상의 작은 내가 가진 일부일 뿐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렇게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안전귀가 했을 땐 스스로에게 뿌-듯.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 쿠팡 이ㅅㄲ, 몸은 고되지만 친절한 여사님이 밥도 주고, 다음 날 돈도 준다. 시급 계산해 보면 눈물 나지만. 이걸로 울 것 같았음 쿠팡 안 갔겠지ㅎㅎ

쿠팡_알바_입금



+ 아, 출근을 기원하며 샀던 자물쇠는 필요 없었음.
포장 뜯지 말고 환불할 걸ㅎㅎ
초코는 요긴하게 잘 먹었다!

+ 쿠팡 핑계 대고 살까 말까 고민하다 접어두었언 카시오 전자시계 다시 뽐뿌. 정작 전자시계는 반입이 안된다는데.
알게 뭐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